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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서점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노는 것이 왠지 두려운 분들에게 권함

by 테라코타02 2021. 8. 18.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이후에 가장 유쾌하고 웃기는 책을 만났습니다. 혼자 책을 보면서 정말 주변 생각 않고 빵 터지는 제 모습을 보면 '누군가 내 모습을 보면 정말 황당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책이 바로 편성준 작가가 쓰고 그의 아내가 기획한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입니다. 출판사는 익숙하게 들어보지는 않은 몽스북이라는 곳입니다. 책 표지에 간단한 선 만으로 그려진 부부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심플합니다.

1. 놀고 싶은 남자와 놀 줄 아는 여자

책을 쓴 작가는 남편이지만, 부인인 기획자 분도 사실은 같이 이 에세이를 썼다고 해도 될 만큼 책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 책 제목만 들었을 때는 아무래도 젊은 부부가 최근에 직장을 순차적으로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가끔 일하거나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쓴 책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까 편성준 작가가 47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늦깎이 결혼을 하고, 직장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을 겪고는 퇴사한 뒤에 성북동의 오래된 한옥을 사서 리모델링한 다음에 '성북동 소행성'이라는 집이자 문화 콘텐츠 공간을 만들어서 생활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줄거리는 한 문장으로 축약하다 보니까 작가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를 평생 해 왔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기도 하고 알맹이가 어느 한 곳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느낌입니다.

편성준 작가 역시 직장을 그만두고는 겪었던 감정과 일상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데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그의 글에 과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표지 사진
편성준, 윤혜자 부부의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의 표지.

2. 놀고 있지만 물 아래는 끊임없는 물장구

부부는 둘 다 그다지 결혼에 관심이 없다가 술이 인연이 돼서 가정을 이룹니다. 퇴사하고 나서 삶을 이어나가야 하기에 카피라이터와 대형 출판사 기획일을 했던 부부는 전국의 스마트팜 취재를 하기도 하고, 토요일이면 소설책을 읽는 모임을 열기도 하고, 아내는 매일 먹는 밥상을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거나 종종 요리교실을 열기도 합니다.

사실 작가는 하와이로 신혼 여행을 다녀온 뒤 일감이 딱 끊기는 사태가 발생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라는 공개 구직 글을 1, 2탄으로 쓰기도 하고 놀면서도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경제활동을 합니다.

브런치(요즘 누가 책을 읽어요)와 SNS에도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점과 점으로 이어지는 삶의 밑바탕에는 부지런함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궁리하는 부부의 일상이 되레 눈에 띄면서도 부러운 구석이 많습니다. 카피라이터답게 글을 좋아하는 작가는 마루야마 겐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로런 그로프 <운명과 분노>를 추천합니다. 

최근에 한 유튜버가 최근에 퇴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면서 '정답을 알기 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라고 적었는데, 10년이 지나도 모르기도 하고 20년이 지나서 아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사는 참으로 가지각색이라서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 '미루지 말고 지금 놀자'라고 말합니다. 말이야 쉽지만 막상 '부부가 둘 다 놀고 있다'라는 대답을 하면 속으로는 내심 부러우면서도 '어떻게 먹고사나' 싶기도 하고,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라면서 반신반의부터 하는 게 우리네 삶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진짜로 글과 웃음, 느긋한 것까지 코드가 잘 맞는 덕분에 준비 없이 맞이한 '노는 생활'을 별 탈 없이 이어가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본인들도 두려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하다 보니 할 만하다고 합니다.

3. 이렇게 유쾌한 책은 처음이야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는 때아닌 주말 새벽녁에 읽게 됐는데 기운이 처지는 시간임에도 진짜 크게 소리 내서 서너 번을 웃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이 웃은 책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나이가 좀 어릴 때는 나쓰메 소세키가 쓴 소설의 주인공이 생각하는 거나 독백하는 내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웃겨서 혼자 '쿡쿡' 웃었는데, 이 책은 정말 유쾌하게 크게 웃었습니다.  

책에 소개된 '대결'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두 줄짜리 글을 인용해 봅니다.

'술약속이 생겼다고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자기는 이미 소주를 세병째 마시고 있다고 한다. 또 졌다'

자칭 부주의한 성격 때문에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자주 겪는 작가의 재미있면서도 어떨 때는 짠하게 다가오거나,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일상은 이 책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적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쩍슬쩍 지나가는 에피소드는 작가의 캐릭터를 완성해 주고 그가 솔직한 성격이 아닐까 싶은 호감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작가가 농담처럼 던지는 에피소드와 생각이 그 안주머니를 뒤집어 보면 우리가 누구나 어떤 나이가 되든지 간에 한번 이상은 고민해 온 일과 삶의 밸런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책에 답이 있다기 보다는 책을 읽고 나서 내 생활은 어떤지, 잘 놀면서 잘 일하고 있는지,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제 생각에는 직장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시간이 지나고 하면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왜 그런지 정말 빠르게 흘러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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