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서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대 감성 작가들의 재택 일상

by 테라코타02 2021. 7. 29.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팬데믹 시대가 2년째 접어들면서 대부분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가운데 여성 작가 10명이 집에서 일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담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읽었습니다.

세미콜론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처음 봤을 때는 책 표지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눈길이 갔고, 저자 10명 가운데 몇 분은 종종 다양한 창작물에서 들어본 작가들이어서 눈길이 갔습니다. 개나리꽃 보다 노란빛이 강한 바탕에 음식, 식물, 가구 등의 그림이 잔잔하게 박혀 있습니다. 아마도 여성 분들이라면 한번씩은 누구나 들어서 열어볼 것 같은 디자인입니다.

부제로는 '나의 작은 집에서 경험하는 크고 안전한 기쁨에 대하여'라고 적혀 있었는데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어서 밋밋한 드라마나 동영상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잔잔한 일본 드라마처럼 각각의 에피소드를 부담 없이 영상으로 담아내면 오히려 그 밋밋함이 가슴 깊숙이 다가오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대부분 많이 대중적이거나 요란한 분위기가 없는 작가들인 것 같아서 친근하게 다가왔고, 저자들의 삶은 어떤 부분은 나 스스로와 닮은 부분이 있었는데 꾸미지 않은 솔직하고 덜 다듬어진 듯한 감성이 읽기에 편했습니다. 글은 다 인상적이었지만 여기 블로그에서는 몇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글들은 모두 재택 라이프가 좋다기 보다는 각자 다른 유형의 삶을 살면서 스스로의 루틴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가끔은 이게 잘 안되기도 하고, 누구나 불안감이 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책 표지 사진
여성 작가 10인의 할 수 있는 하고 있습니다.

1. 퇴사후 N개 일을 하는 채식주의 작가

'내 몫의 여러 생활에 충실한 생활'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는 강보혜 님이 쓴 글입니다. 퇴사 3개월 전에 홍제천 근처에 집을 얻어서 생활하면서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채식 지향 삶을 실천하다가 채식 집밥 수업도 하고 소위 말하는 1주일에 30시간 정도를 일하는 N잡러가 된 스토리입니다.

제가 좋았던 부분은 새로 이사한 집 근처의 이웃들과 처음으로 소통하면서 살게 되는데 '각자에 대해서 너무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믿음직하게 여기는 적당히 목적지향적인 21세기형 이웃'들과 교류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20대 때는 어디론가, 또는 무언가를 찾아서 밖으로만 다니려고 했던 저자는 집에서 단단한 일상을 보내게 되면서 삶의 무게중심을 안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사회 생활이나 직장에서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만들게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저자는 동거인과 함께 처음으로 반려동물을 임시보호하다가 입양까지 해서 반려인의 삶을 새롭게 도전하게 됩니다.

2. 떠난 반려견을 그리워하면서 루틴을 지키는 삶

8년차 일러스트레이터인 봉현님은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드라마'라는 글을 썼는데 저자의 하루 루틴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6시부터 12시까지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잠시 낮잠을 자거나 집안일을 끝내고는 오후 5시부터는 그림을 그리는 일상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집에서 일을 해 본 사람은 재택 생활이 길어지면 이러한 루틴은 엄청난 절제력과 노력이 있지 않으면 흐트러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루틴 속에서도 집에서 일하는 5가지 원칙을 나름대로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집과 복장의 청결, 식사는 꼭 챙길 것, 어떻게든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부분이 와닿았습니다.

가장 좀 마음이 무거워진 부분은 여행을 좋아하던 저자가 키우던 반려동물 여백이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여백이가 혼자 집에 있었을 때의 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상상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저자는 세상이 너무 잔인할 때 집으로 도망쳐 오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3. 3인 가정의 복닥복닥 재택 일상에서 찾는 즐거움

은둔형 번역가라고 소개한 이지수 님의 '대체로 무기력하지만 간혹 즐겁게'는 우리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실감 나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찾아보니까 이지수 님은 <아무튼, 하루키>를 쓴 작가이고,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등 일본 에세이를 여러 권 번역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갑자기 재택근무가 길어진 남편과 처음으로 한 집에서 일하게 된 상황, 아이가 유치원에 등원하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극명한 대조. 특히 재택근무하는 남편이 직장 사람들과 영상 통화하면서 칼같이 "넵!"이라고 답변하는 장면에서는 직장인들의 짠한 감정이 올라오더군요. 또한 남편과 하루 종일 같이 보내게 되면서 '오늘 하루 정말 열심히 일했어!'라고 큰소리칠 기회가 없어졌다는 부분에서 빵 터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코로나로 유치원 등원이 안 되는 날에 대해서 '그것은 직장 상사가 잘 때 빼고 24시간 옆에 딱 붙어서 정신없이 일을 시켜대는 상황과 비슷하다'라고 적었는데 엄마들이라면 동질감이 확 와닿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저자는 정신적으로 힘든 순간에 아이가 오줌을 싼 바지를 들고 폭풍 눈물을 흘린 날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자는 복닥거리는 일상이지만, 고장 난 TV를 대신해 벽에 빔 프로젝트를 쏴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열망을 실현했고, 마침내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까지 배워서 아이의 어릴 때 영상을 보면서 즐거워합니다.

팬데믹에 지친 가깝고도 먼 모든 사람들이 '오늘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